~ 1200 BCE후기 청동기 붕괴연재 본문

회차 031

31화. 후기 청동기 문명은 왜 무너졌을까? 오지 않은 배와 수레

기원전 약 1200년 우가리트 항구에서 보급망 붕괴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사람들이 곡물을 배급받는 모습

그날 우가리트 항구에는 배 두 척과 짐수레 행렬 하나가 들어와야 했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항구 창고를 맡은 여자가 빈 선착장을 보며 말했다.

“구리는 알라시야에서 오고, 주석은 여러 나라의 손을 건너오고, 곡물은 내륙에서 옵니다. 셋 중 하나만 늦어도 왕궁은 우리를 닦달하죠.”

“오늘은 셋 다 늦었군.”

“그러니까 오늘은 세 번 닦달당하겠네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도 웃을 수 없었다.

우가리트의 항구와 왕궁 창고에는 먼 곳에서 온 물건이 모였다. 키프로스의 구리, 여러 길을 거쳐 온 주석, 내륙의 곡물, 다른 바다의 도자기와 기름이 저울과 점토판 위에서 자리를 찾았다.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상인들은 무게와 봉인을 확인했고, 서기관들은 어느 왕과 어느 창고의 몫인지 적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그 풍경은 힘처럼 보였다. 한 도시가 혼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와 기술을, 여러 나라가 나누어 맡아 가져왔다. 청동 장인은 광산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왕은 모든 밭을 직접 다스릴 필요가 없었다. 길과 항구와 약속만 이어져 있으면 됐다.

문제는 그날, 그 셋이 모두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궁에서 점토판이 왔다. 북쪽의 지배자에게 보낼 곡물을 예정대로 내놓으라는 명령이었다. 거의 동시에 성벽을 보강할 사람을 모으고, 병사에게 줄 창끝도 준비하라고 했다.

창고 여자가 내게 빈 곡물 항아리를 밀어 보였다.

“보내면 항구 사람들이 굶습니다. 남기면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나는 점토판 세 장에 답장을 썼다. 내륙의 창고에는 곡물 수레가 어디까지 왔는지 물었다. 알라시야의 상인에게는 구리 배의 소식을 물었다. 왕궁에는 주석이 없어서 새 청동 창끝을 약속할 수 없다고 적었다.

첫 답장은 해 질 무렵 왔다. 길가 마을들이 곡물을 내놓지 않아 수레가 멈췄다는 내용이었다. 그들도 다음 수확까지 먹을 것이 부족했다.

두 번째 소식은 답장으로 오지 않았다. 남쪽 항구에서 달아난 사람들이 전했다. 바다에서 온 무리가 창고를 털고 배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세 번째 점토판에는 병사와 전차가 다른 전선에 나가 있으니 성문을 지키며 버티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창고 여자가 물었다.

“누가 우리를 도우러 옵니까?”

나는 점토판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곡물을 가진 마을도, 배를 가진 상인도, 병력을 가진 왕도 모두 자기 문제에 붙잡혀 있었다.

“아무도 못 와.”

우리는 왕궁 창고의 봉인 앞에 섰다. 안에는 며칠을 버틸 곡물이 남아 있었지만 왕의 몫이었다. 그녀는 부두 노동자들의 가족부터 성 밖으로 보내자고 했다. 나는 봉인을 지키는 서기관이었다. 그녀는 그 봉인 때문에 굶을 사람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었다.

“열면 당신이 벌을 받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안 열면 네가 아는 아이들이 먼저 굶어.”

나는 왕의 봉인을 뜯었다. 그런 뒤 문 옆의 젖은 점토에 내 인장을 눌렀다. 왕의 창고를 내가 열었고, 그 책임도 내가 진다는 표시였다.

우리는 곡물을 똑같이 나누지 않았다. 성 밖으로 떠날 아이와 노인에게 먼저 주고, 물을 나를 사람과 남아 성벽을 고칠 사람의 몫을 따로 셌다. 공평해서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일 수 있게 하려는 배분이었다.

담장 아래의 남자가 그 대목에서 말했다.

“그렇게 많은 나라가 연결돼 있었다면, 한 곳이 어려울 때 다른 곳이 도와주면 되지 않았습니까?”

“평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길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생기면 달라집니다. 곡물을 보낼 마을도 굶고, 배를 보낼 항구도 공격받고, 병력을 보낼 왕도 다른 전선을 막고 있었죠. 연결망의 모든 끝이 동시에 잡아당기면 가운데에는 여유가 남지 않습니다.”

복잡한 문명은 모든 도시가 파괴되어야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농부는 안전한 길을 기다리고, 장인은 주석을 기다리고, 병사는 곡물을 기다리고, 항구는 병사를 기다릴 수 있었다. 사람과 재료가 그대로 남아 있어도, 서로가 먼저 움직여 주기만 기다리기 시작하면 전체가 멈췄다.

며칠 뒤 창고 여자는 가족들과 함께 내륙으로 떠났다. 나는 그녀에게 남은 곡물 한 자루와 왕궁의 출입 표식 하나를 주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아직 그 표식이 통할 거라고 믿었다.

오래 통하지는 않았다.

우가리트의 왕궁과 항구는 파괴됐고 도시의 많은 부분이 불탔다. 도시는 다시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작은 마을과 다른 항구에서 밭을 갈고 배를 고치고 새 길을 만들었다. 왕들이 이어 놓았던 큰 그물은 찢어졌지만, 사람들은 찢어진 매듭을 더 작은 생활로 다시 묶었다.

후기 청동기 붕괴가 남긴 법칙은 연결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연결은 각자가 혼자 만들 수 없는 힘을 주었다. 다만 여러 몫을 궁정 하나에 모으고 먼 공급처 하나에 너무 깊이 기대면, 같은 길이 위험을 퍼뜨리는 통로가 됐다. 연결망은 힘이었고, 그 힘을 지탱할 여유가 사라졌을 때는 충격을 함께 나르는 길이 됐다.

훗날 나는 불탄 창고에서 내 인장이 찍힌 점토판 하나를 찾았다.

장부에는 곡물이 어디로 갔는지 남아 있었다.

그 곡물을 먹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장부에 없었다.

역사 메모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12세기에 걸쳐 동지중해 여러 지역의 궁정·도시·교역망이 서로 다른 시점과 방식으로 붕괴하거나 재편됐다. 우가리트는 키프로스산 구리와 내륙 곡물, 여러 언어의 상인과 문서가 모인 항구 왕국이었으며, 기원전 1200년 무렵 왕궁·항구와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된 뒤 같은 도시로 재건되지 않았다. 다만 후기 청동기 붕괴를 해상 집단 하나나 단일 재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공격과 인구 이동, 가뭄과 식량 압박, 내부 갈등, 궁정 부담, 교역 차질 등이 지역마다 다른 순서로 겹쳤다는 견해가 강하다. 일부 지역은 계속 거주되거나 더 작은 조직으로 재편됐으므로 동지중해 전체가 한날에 사라진 사건도 아니었다. 본문의 창고 여자·세 장의 답장·곡물 배분은 우가리트의 교역·행정 문서와 파괴 맥락을 압축한 허구다. 우가리트의 행정·교역과 파괴·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후기 청동기 위기의 다원적 원인과 지역별 차이·미국고고학저널 · 구리·주석과 원거리 교역을 보여 주는 울루부룬 난파선·해양고고학연구소 · 우가리트 왕국 남부 항구의 파괴 이후 지속과 재편·PLOS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