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000
프롤로그 — 그랬던 적이 있지
20XX년 CE
내 머리카락이 검은색에서 옅은 금빛으로 변하는 데는 세 번 숨 쉴 시간이 걸린다.
그날 나는 놀이터 뒤편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미끄럼틀 아래에 세 아이가 숨어 있다는 것만 빼면.
“봤어?”
“눈도 파래졌어.”
“아저씨, 러시아 사람 같아요.”
나는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확인했다. 금발에 푸른 눈.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색이긴 했다.
“색만 보고 국적을 맞히면 자주 틀려.”
나는 러시아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이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진짜 러시아 사람이에요?”
“그랬던 적은 있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는데요?”
“1812년부터 1917년까지.”
잠깐 조용해졌다.
“거짓말.”
그 말은 아이들 뒤에서 들렸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셋 중 가장 작은 녀석과 눈매가 닮아 있었다.
“누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 그리고 머리는 염색이고, 눈은 렌즈겠지.”
“렌즈는 아니야.”
내 눈동자가 푸른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머리카락에는 붉은빛이 번졌다.
“러시아에서 살기 전에는 노르드인이었고.”
이번에는 피부가 조금 짙어지고, 머리와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그보다 전에는 로마인이었지.”
막내가 누나의 등 뒤로 숨었다.
“괴물이다.”
“괴물은 아니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신도 아니고.”
이 말은 여러 번 해 본 적이 있었다.
나를 믿지 않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며 돌을 던졌다. 나를 믿은 사람은 무릎을 꿇고 병을 고쳐 달라거나, 죽은 이를 돌려 달라거나, 전쟁의 승자를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속임수가 있어.”
누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손에 든 휴대전화가 나를 향하다가 조금 내려갔다.
저 작은 판은 눈앞의 장면을 단숨에 붙잡는다. 한때는 얼굴 하나를 남기려고 몇 분씩 꼼짝하지 않아야 했다. 그보다 전에는 물감과 손재주가 필요했고, 훨씬 전에는 벽과 숯이 필요했다.
세상은 아직도 가끔씩 믿을 수 없을 만큼 편리해진다.
나는 그게 좋았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옛날 장난 하나 보여 줄까?”
화단 가장자리에서 작은 돌 다섯 개를 골랐다. 하나를 위로 던지고, 바닥의 돌을 쓸어 담은 뒤 떨어지는 돌을 받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는 손등으로 다섯 개를 모두 받았다.
“우와!”
아이들이 금세 쪼그려 앉았다. 막내는 괴물이라는 말을 잊고 돌부터 집었다. 누나도 휴대전화를 완전히 내렸다.
이 놀이는 아주 오래되었다. 돌 대신 양의 발목뼈를 쓰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돌을 던지기 전에 꼭 이마에 두 번 갖다 대곤 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이는 내 허리에도 닿지 않았다.
나중에는 손이 떨려 돌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이마를 두 번 두드리는 버릇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나는 손안의 돌을 굴렸다.
“그럼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아이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나도 몰라.”
“백 살 넘었어요?”
“훨씬.”
“천 살?”
“그것보다도 훨씬.”
나는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쪽이 깨져 날카로워진 평범한 돌이었다.
“적어도 삼백삼십만 살보다는 많아.”
이번에는 누나도 웃지 않았다.
“말도 없고, 나라도 없고, 사람에게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던 때부터 살아 있었어. 그때는 이런 돌 하나를 다르게 깨뜨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지.”
“돌을 깨뜨린 게 그렇게 대단해요?”
“나도 처음에는 몰랐어.”
나는 돌의 날을 엄지로 천천히 문질렀다.
그날 나는 배가 고팠다.
손에는 상처가 있었고, 눈앞에는 좀처럼 찢어지지 않는 질긴 것이 있었다.
그리고 돌 하나가 전과 다르게 깨졌다.
“어떻게 됐는데요?”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는 아이도 없었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말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긴 이야기인데.”
나는 웃었다.
“들어 볼래?”